3.17 유콘 여행 6일차.
3.19 인천행 비행기 안에서 작성
유콘의 여름은 해가지지 않는다. 백야현상에 대해 배울 때는 그냥 신기하구나~ 생각했는데 여기 와서 보니 ‘아침은 해가 뜨고 저녁은 해가 진다’라는 당연한 진리가 틀리다면 생활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실감하게 된다. 해가지지 않으니 하루 종일 야외활동을 할 수 있고, 해가 몇 달동안 따뜻한 빛을 쏘아주니 극지방인데도 온도가 20도가 넘게 올라가 반팔을 입고 다닌다. 잠을 자려면 두꺼운 커튼을 치고 밤처럼 해놓아야 한다. 다음에 올 기회가 있다면 꼭 여름에 와서 직접 느껴봐야겠다.

파멜라의 집 거실. 아늑하다. 이렇게 넓은 집에 뒷마당 앞마당 차고 다 갖추고 사는 집 보면 부럽기만 하다.

오늘과 내일은 차를 빌려서 드라이브를 다닌다. 편한 이동을 위해선 여행기간 내내 차를 빌리는 것이 좋겠지만, 보험료 포함 하루 100달러(9만원)이나 되는 가격에 놀라서 딱 이틀만 빌렸다. 여기에 하루 200km 이상 달리면 추가비용을 내야되고, 가스충전도 내 돈으로 해야되니 완전 바가지 쓴 기분이다. 이 동네에선 옆 도시만 다녀와도 왕복 300km인데, 하루 200km라니 장난하나?

우선 렌터카 회사에 갔다. 차는 주행거리 10000km가 갓 넘은 새 차인데 스노우타이어가 아니라 약간 불안하다. 스노우타이어가 장착되어 있는 차가 없다는데 그렇다고 차를 안 빌릴 수는 없으니 큰 길로만 다니기로 했다. 보험이 하루에 25달러라 들까 말까 진지하게 고민했는데, 보험 안 들고 운전한다는게 아무리 생각해도 좀 아닌 것 같아 보험을 신청했고, 결과적으로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보험 아니었으면 돈 엄청 물어줄 뻔 했다.
오늘의 드라이브코스는 남쪽으로 내려가 클론다이크 고속도로를 따라 카크로스를 지나 미국 국경을 넘어 알래스카의 스캐그웨이Skagway까지 가는 180km 코스로, 예전에 금과 나무를 실어나르던 역사깊은 도로이다. 원래는 금요일에 가려고 했는데, 눈보라가 치면 도로가 막힐 수 있으니 미리 다녀오라는 켄의 조언에 따라 오늘 가기로 했다.

운전을 하니 드디어 이동의 자유를 얻은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슬슬 시동을 걸고 고속도로를 따라 카크로스까지 달린다. 차가 없고 길이 일직선으로 되어있어서 차랑 부딪힐 걱정은 없는데 속도 조절이 안 된다. 110km로 달려도 느리게 가는 것 같은 기분. 가는 길은 정말 산과 물이 어우러진 절경중의 절경이라서 ‘입이 딱 벌어진다(영어로도 Jaw-dropping이라고 하더라)‘는 표현이 딱 맞다. 몇 번이나 멈춰서 사진을 찍고 갔다. 얼어붙고 눈이 쌓여도 이정도인데 여름엔 얼마나 멋질까 상상해본다.



원래 계획은 카크로스에 가서 커피 한잔 하고가려고 했는데, 유콘루트 열차가 다니지 않는 겨울의 카크로스는 단 하나의 가게도 연 곳이 없었다. 정말 단 하나도. 우체국과 관광안내소도 문을 닫았다. 주차되어 있는 차가 있으니 누군가 살고 있긴 한데 뭐하면서 사는걸까? 적막한 마을에서 사람이 많을 여름을 상상하며 사진을 몇 장 찍었다.





휴게소에서 커피와 정직한 핫도그(진짜 햄이랑 빵만 있음)를 먹고, 계속 남쪽으로 향한다.



산 위로 점점 올라가면서 눈이 내렸는데, 만년설이 쌓인 산과 구름 낀 하늘이 구분되지 않아 눈앞이 순백이 되었다. 온통 하얀 풍경 속에서 검은색 도로만이 내가 어디로 가야할지 알려주는데, 신비로우면서도 무섭고,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드는 순간이었다.

지나가는 차를 못 본지 20분쯤 되어서 인기척이 그리워질 때 쯤, 산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국경이 나타났다. 이런 곳에서 사람을 만나니 반갑기만 하다. 이 사람들은 일년 내내 여기서 근무하려면 엄청 심심하겠지.. 미국 세관에서 까다롭게 검사할까봐 걱정했는데, 세관 아저씨가 갑자기 내 여권을 보더니 안녕하세요라고 한국말로 인사를 건넨다! 미군출신으로 일년동안 한국에서 카추사로 근무했다던데, 이런 데에서 만나게 되다니 참 세상이 좁다. 어쨌든 이 아저씨 덕분에 무사히 국경을 통과했다.

산을 내려가니 눈이 그치고 저 멀리 태평양이 보인다. 목적지인 알래스카 스캐그웨이에 도착한 것이다. 국경선을 보면 미국 알래스카 주 영토가 캐나다 해안선을 따라 내려와 있어서 왜 그런지 궁금했는데, 아마 알래스카 고속도로를 지어주는 대가로 캐나다에게 해안선을 달라는 요구를 해서 지금과 같은 국경선이 그어진 것 같다. 캐나다는 도로를 얻고 미국은 전쟁과 물류를 위한 해안기지를 얻는 윈윈 협상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국경선을 잘 살펴보면 역사를 알 수 있어서 흥미롭다.

스캐그웨이는 골드러시 때 생긴 마을로,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라는 원주민어 스카구아Skagua에서 따온 이름이다. 지금은 텅 빈 거대한 항구와 공항을 보면서 골드러시와 전쟁 때 사람들로 가득했을 100년 전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카크로스보다는 큰 이 마을에도 역시 문 연 가게는 보이지 않았다.

거리를 지키는 개도 쓸쓸하다.


마을에서 간신히 발견한 카페. 유일하게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에서 햄버거를 먹을 수 있었지만, 오후 두시까지만 영업한다고 해서 바로 나와야 했다. 이 사람들은 겨울동안 집에서 뭐하고 사는걸까..? 아니면 겨울엔 다른데 가서 사나? 아직 이해할 수가 없다.


그냥 떠나기 아쉬워 마을을 뒤진 끝에 네시까지 영업하는 커피숍을 발견했다! 이런 세련된 커피숍이 있다니! 시골마을에서 스타벅스를 만난 것 같은 어색함이다. 커피의 위대함을 느끼며 잠시 노트북을 꺼내 시간을 보낸다.


놀러온 마을 아이들. 심심해서 어떻게 살까? 학교는 있겠지?

돌아가는 길에 골드러시 공동묘지가 있어 잠시 들렀다. 골드러시때 왔다가 죽은 사람들이 묻힌 곳이다.

이 사람들은 머나먼 알래스카까지 와서 묻힐거라고 생각했을까? 이 사람들의 죽음은 행복한 죽음이었을까? 비석이 세워진 큰 무덤의 주인은 성공한 삶을 살았겠지만,

UNKNOWN이라고 적힌 나무팻말 아래 묻힌 사람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왔다가 불행하게 죽어갔을 것이다. 숙연한 마음으로 혼자 공동묘지를 걸어다니다가, 왠지 오싹한 느낌이 들어 곧바로 차에 탔다.

돌아오는 길에도 역시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었고, 캐나다 국경에서도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눈이 좀 그쳐 이제 하늘이랑 땅이 구분이 간다.

켄의 집에 저녁초대를 받아 6시까지 가기로 했지만 가는 길에 사건이 하나 터지고 말았다. 캠핑카가 모인 캠핑존에 들어가서 구경하다가 나오는 길에 그만 캠핑카 하나를 후진하다가 들이받고 만 것이다. ㅡㅡ 한국에서는 사고낸 적 없는데 여기서 접촉사고를 내다니.. 뒤에 차가 있을거라고 생각 안하고 백미러를 안 본 내 잘못이었다.

문제의 캠핑카.

다행히 튼튼한 캠핑카는 흠집 하나 안 나고, 내 뒷 범퍼와 백라이트만 살짝 금이 갔다. 보험 들어놓길 천만 다행이다. 차에 내려서 캠핑카 주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데, 캠핑카 주인이 심심했는지 맥주 한 캔 마시고 가란다. 응? 이게 뭐지? 하면서도 디스 이즈 어드벤처!를 속으로 외치며 기꺼이 맥주를 받아마신다. 캠핑카 주인아저씨는 아들과 사위까지 셋이 캠핑카와 스노모빌을 끌고와서 3일째 맥주 + 고기 + 스노모빌 파티를 즐기고 있었는데, 셋만 있기 지루해질 때쯤 마침 내가 와서 차를 들이받은 것이었다.;;; 뜻밖의 환대에 나는 엄청 당황했고, 손님이 와서 신난 아저씨는 나한테 자기네가 맥주를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바비큐를 어떻게 구웠는지, 스노모빌이 얼마나 재밌는지 구구절절 설명했다. 난 민망해서 자리를 빨리 뜨고 싶었지만 얼떨결에 아들이 스노모빌을 태워줘서 생각 안하던 스노모빌까지 타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사고를 낸 가해자에게 맥주도 주고 스노모빌도 태워준 것이다. 캐나다의 후한 인심이란...
여기서 같이 자고가라는 부탁을 뿌리치고 다시 화이트호스로 향했다. 아직 이 당황스러운 상황이 정리가 되지 않는다.

7시 반이 되어서야 켄의 집에 도착했는데, 안에는 켄 부부와 크리스티나, 그리고 켄의 다른 집에서 세들어 살고있는 사스Sas와 메리Mary, 그리고 켄 부부의 아들의 친구로 보이는 남자까지 6명이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인연을 만들었다.


라자냐를 배터지게 먹고 나서 켄 아저씨가 늑대를 잡은 얘기, 그리고 켄 아저씨가 크레바스에 빠졌다가 살아나온 얘기를 들었다. 이 아저씨 엄청 대단한 사람이었다. 영화에 나올만한 사건의 주인공이었다니. 하지만 아저씨가 말이 너무 많아서 다들 피곤해지기 시작한다.. 난 중간쯤부터 영어듣기에 집중하기가 힘들어 아예 멍때리고 있었다. 영어에 계속 집중하자니 너무 피곤하다.

켄 아저씨가 자기가 나온 잡지를 직접 보여주셨다. 이 아저씨 알고보니 유명인이었다.

30m 크레바스에 빠졌는데 정말 천운으로 살아나왔다고.
그렇게 만찬을 마치고 열시 쯤 집에 돌아왔다. 오늘이 성 패트릭 데이라면서 시내 펍에 맥주를 마시러 가자고 했지만 운전을 오래해서 피곤한데다 왠지 어색할 것 같아서 안 갔다.
내일의 드라이브를 기대하며 조금 일찍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