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4~26 칠레여행 4~6일차 in 토레스 델 파이네

12.1 저녁 칠레 발파라이소 Acuarela 호스텔에서 작성



집 떠난 지 세달째.

  인도에서 받아서 담아온 비정상회담을 보는데 3회인가 제임스 후퍼가 그런 말을 했다. 자기는 에베레스트 등반이 꿈이었는데 막상 에베레스트 등반을 하고 나니 허무하고 우울증이 찾아왔다고. 제임스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몇년동안 긴 여행을 꿈꾸면서 지내왔는데, 대체 이게 끝나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하고 싶지 않다. 가끔씩 여행이 지루하고 피곤하다가도, 한국으로 돌아간 생각을 하면 정신이 번쩍 들곤 한다. 지구 반바퀴 돌아 집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지금, 한국에 돌아가고 싶으면서도 가고 싶지 않은 복잡한 기분으로 여행중.


 


 셋째날은 가장 힘든 코스 . 완만한 오르막길을 12km 올라간 뒤 짐을 놓고 전망대까지 다시 왕복 10km를 다녀온다. 마지막 전망대를 넷째날 아침 일출을 보러 갔다오는 사람이 많다지만 우린 그걸 몰라서..그냥 오늘 갔다왔다. 짐은 훨씬 가벼워졌지만, 아침부터 발이 아프고 물집까지 잡혀서 쉽지 않은 일정이 될 것이라는 느낌이 온다.


 

 역시 아침은 오늘도 든든하게.



 현재 위치와 코스 정보를 알려주는 표지판. 이곳 표지판들은 참 예술적으로 잘 꾸며놓아서 볼 때마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거의 산을 등지고 호수를 보면서 걷는 코스. 앞에는 이런 에메랄드 빛 호수가 있고,

 

 

 뒤를 돌아보면 산이 든든하게 서 있다. 나는 산을 더 좋아해 산을 보고 걷는 어제 코스가 더 좋았지만, 덕희형은 오늘같이 탁 트인 호수와 들판을 보면서 걷는게 더 맘에 든다고 하신다.



 가는 길에 계속 센 바람이 불었는데, 다행히 서풍이라 동쪽으로 걷는 우리는 편하게 바람의 도움을 받으며 갈 수 있었다. 어찌나 바람이 센지 호수 위로 물보라가 날려 이렇게 무지개가 생길 정도. 


  

  사람을 앞에서 찍으면 인물사진이 되고 뒤에서 찍으면 풍경사진이 된다고 누군가 그랬는데, 그 말이 마음에 든다.  





 올라가다가 길을 지나가는 말들을 발견. 여기서 말은 관광용이나 물자 운반용으로 쓰인다. 말을 끄는 직원들이 전부 아르헨티나 전통 카우보이 복장을 하고 있다. 덕희형이랑 어떻게 말이 가파른 길들을 지나갈 수 있을지 계속 토론(?)을 했다.



 UFO같이 보이는 신기한 구름. 



  넘어가면 바로 숙소가 나올것만 같은 작은 언덕(하지만 언덕을 넘으면 또 다른 오르막길이 있다)을 10개정도 지날 때쯤, 숙소와 전망대가 있는 계곡 입구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세시간. 거리상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30분이면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바람이 문제였다. 산 정상에서 계곡 입구로 불어오는 바람이 입구부터 심상치 않았는데, 조금 걸어가자 바람이 더 세져서 몸이 휘청거리더니 나무가 없는 곳에서는 정말 사람을 날려버릴 것 같은 바람이 5분정도 부는 바람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돌벽에 포복자세로 붙어있어야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람때문에 사람이 날아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고, 바람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것도 처음이었다. 이런 바람에서 움직였다간 넘어져서 옆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질 것만 같았다. 이날 바람이 초속 60km/h 였는데 순간 경험한 바람은 그 이상이었던 것 같다. 이틀동안 오면서 길 주변에 쓰러진 나무들이 많아 왜 이런건지 이런저런 추측을 했었는데, 이 바람을 겪고 나니 바람때문에 나무가 뽑혀서 쓰러진걸로 결론을 내렸다.


 바람이 세게 분 곳이 바람길이었던지 이곳을 지나니 숲이 바람을 막아줘서 그렇게 센 바람이 불진 않았고, 나중에 만난 다른사람들한테 물어보니 역시 그곳에서 비슷한 바람을 맞았다고 한다. 결국 한 시간 정도 지나서야 Chileno 캠핑장에 도착. 여기서도도 강풍이 부는건 마찬가지였지만 걸을만 했다. 



 덕희형이 사주신 콜라와 빵. 흔히 먹는 콜라와 빵인데 여기서 먹으니 왜이렇게 감동적이었는지 모르겠다. 우리 둘 다 딱 캠핑장에서 쓸 비용만 있어서 아무것도 못 사먹고 다녔는데, 덕희형이 카드로 긁어주셔서 은혜로운 빵과 콜라를 영접할 수 있었다.


 

 어제같이 텐트 자리잡느라 고생하지 않기 위해 미리미리 텐트를 치고, 30분정도 쉬다가 계속 계곡을 오른다. 마지막 전망대까지는 두시간이 걸렸고, 그 중 한시간은 정말 전체 트레킹 일정 중에서 제일 힘든시간이었다. 1km를 가면서 400m의 높이를 올라가야 하는데 경사가 가파른데다가 발은 아프고 목적지는 가도가도 안 나와서 '형 혼자 다녀오세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여기까지 고생해서 왔는데 마지막 전망대를 포기한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기 때문에 오기로 한발한발 나아갔다. 



 

숲을 지나



돌 산을 오르고



가끔씩 부는 모래바람을 피하고 나니



 마지막 전망대인 호수에 드디어 도착할 수 있었다. 솔직히 전망 자체는 엘 찰텐에 있는 피츠로이 아래의 호수보다 별로였지만, 지금까지 온 일정과 오면서 한 고생들을 생각하면 이곳의 의미는 피츠로이 그 이상이었다. 여기 오면 눈물이라도 날 줄 알았는데 막상 와보니 힘들고 추워서 눈물 한방울 안나왔고.. '드디어 왔구나!!' 정도?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후련해지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복잡미묘했다. 고생 끝에 감격적인 카타르시스가 온 것이다.



숙소부터 전망대까지. 4km라고 써있지만 저 거리는 걸어야 하는 거리가 아니라 직선거리인 것이 분명하다.





아쉬운 마음에 바로 내려가진 못하고 바위 뒤에 숨어 바람을 피하면서 여정의 하이라이트를 즐겼다. 누군가 등산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했는데, 현재의 한발 한발에 집중하면서 작은 목표들을 향해 나아가다보면 어느새 정상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 등산과 인생이 가진 공통점이자 등산의 매력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카타르시스를 맛 볼 수 있으니 서서에서 동으로 가는 코스가 더 낫다는 생각도. 



  부엌이 공사중이라 공사판에서 요리를 해야했지만, 등반 축하 기념 라면과 와인을 마시고 어느 때보다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옆에서는 칠레에 사는 부자(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요리를 하고 있어서 간단히 얘기를 나누었다. 나중에 산티아고 가면 만나기로 하고 연락처까지 받음.



  마지막 날. 가벼운 짐으로 4~5km를 내리막길만 걸으면 되는 코스라 편하게 두시간정도 내려오면 끝이었다. 아침을 천천히 먹고 여유롭게 11시쯤 출발했다.

 



 

 토레스 델 파이네와의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마지막 목적지인 Hotel Las Torres에 도착했다. 여기서 버스를 타고 푸에르토 나탈레스에 돌아가니 4시 반. 



트레킹 애프터 사진. 트레킹 전과 비교하면 많이 초췌해졌음.


  장비 반납하고, 숙소 옮기고 (첫날 묵었던 야간호스텔에 숙소 예약해놨는데 직원이 까먹고 다른 예약을 받는 바람에 -.- 여기저기 찾아다녀야 했다), 저녁 장 보고나니 어느새 시간이 금방 지나가고, 덕희형, 나, 그리고 트레킹중 만난 정원이까지 셋이 토레스 델 파이네 완주기념 고기파티를 했다. 숙소 같이묵는 외국인들이 이거 너희 셋이 먹으려고 산거냐고 또 놀람 ㅋㅋ 하지만 당연히 다 해치웠다.



트레킹 완주 다음날. 덕희형은 다시 엘 칼라파테로 떠나고 그 다음날 아침비행기를 타기 전에 혼자 여유롭게 하루 쉬기로 했다. Josmar라는 이름의 이 호스텔은 론리플래닛에는 안나와있고 숙소 아주머니가 영어도 못 하시지만, 뭔가 가정집처럼 정감이 가는 곳이고 아주머니도 친절하다. 



  하루동안 노트북 쓰다가, 동네 산책좀 하고, 카페가서 커피 마시고 하면서 정말 말 그대로 푹~ 쉬었다. 마을에 아담하고 예쁜 건물들이 많아서 마을 산책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좋았고, 무거운 짐이 없으니 날아갈 것 같은 기분.







동네 대형마트 앞에서 핫도그를 파는 아저씨. 꼭 사먹어보고 싶었는데 마지막 날에 성공!



저녁으로 먹은 엄청 큰 칼조네.


  하루동안 쉬어서 많이 회복이 된 상태로 저녁 8시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세시간 거리에 있는 푼타 아레나스라는 도시의 공항으로 갔다. 비행기가 아침 6시이기 때문에 아침까지 공항에서 노숙. 버스 안에서 옆에 앉은 폴란드 사람이 자기 아시아 여행 많이 다녔다고 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너무 말이 많아서 .. 자는척 하고 틈틈이 창 밖 풍경을 구경했다. 



  그렇게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의 3박4일이 마무리되었다 (앞뒤 일정까지 합치면 5박6일). 이 곳은 정말 기대했던 것 그 이상이었고 남미 여행, 아니 아마 이번 세계일주 전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정이 될 것 같다. 나중에 꼭 다시 찾아올 거다. Adios!

Posted by Joon'